8년만에 내민 명함
8년만에 내민 명함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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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만에 명함을 만들었습니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 광주전남연합(의장 임동규. 이하 광주전남범민련)의 사무실 개소에 대해 이 단체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감회를 대신했다.

89년 고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탄력을 받은 통일운동 진영은 91년 범민련 남측본부의 결성으로 '연방제 통일방안'과 '남·북·해외의 3자연대'라는 원칙을 고집하며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도 94년 재야인사들을 중심으로 광주전남범민련을 구성했다. 하지만 준비위원회체계에서 한발도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조직유지만으로도 힘겨운 7년을 보내야 했다. 매년 8월이면 범민련이 주도하는 범민족대회를 둘러싸고 정부당국과 마찰, 그리고 주요인사의 구속이라는 악순환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현판식 가진 광주전남범민련
'이적'규정 철회 시민서명운동 등
합법 공간에서 폭넓은 활동 기대


광주전남범민련의 민용기 조직부장은"'연방제의 통일방안은 북측의 적화통일방안'이라는 정부당국의 시각과, 3자연대방식은 북측과 만나거나 통신교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실정법상 국가보안법위반을 피할 수 없었"며 "범민련과 관련해 그동안 이지역에서 구속된 사람만도 14명이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97년 한총련과 함께 아예 이적단체로 규정된 뒤로는 성명서 하나를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지난해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는 획기적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올 3월엔 광주전남범민련도 '준비위원회' 딱지를 떼고, 임동규 의장을 세워 8년만에 정식 출범했다. 8월 평양에서 열리기로 한 통일대축전행사에 참가하는 것에 대해서도 정부는 동의해줬다. 비록 이적단체라는 처지이지만 모든 것이 자연스레 풀려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강정구 교수의 '만경대 방명록사건'으로 시작된 공안바람은 결국 방북인사 7명의 구속으로 이어졌고, 그 속에 광주전남범민련의 핵심인 임동규 의장과 박종화 사무국장이 포함돼 있었다.

임의장과 박국장은 현재 국가보안법상 잠입·탈출·회합·통신 등의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이다. 통일대축전의 역사적 성과를 평가할 틈도 없이 8년만에 세운 조직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의장도 사무국장도 없는 광주전남범민련이 다시 일어서고 있다. 11일 오후4시 전남도경찰청에서 5백미터도 안되는 동구 장동로타리 큰 길가에 마련한 사무실에서 현판식도 하고 '범민련에 대한 이적단체 규정 철회와 구속인사 석방'을 요구하는 기자회견도 열었다.

기세문 의장권한대행은 "남북의 대표가 직접 만났음에도 범민련이 아직 이적단체로 규정돼 있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어긋난다"며 "더구나 범민련의 활동은 '이적활동'이 아닌 6.15공동선언을 실현하기 위한 통일운동이기 때문에 이미 사문화 돼버린 국가보안법으로 범민련을 가두는 것은 옳지 않"고 밝혔다.

그는 또 범민련측이 지난 8.15행사 속에서 남과 북, 해외가 만나 강령과 규약을 개정하면서 남한 정부측에 부담을 덜어주었으나 그에 합당한 정부측의 대응이 나오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광주전남범민련은 사무실 개소에 이어 오는 11월 범민련 결성 11돌을 앞두고 범민련의 이적규정철회를 위한 시민단체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합법공간에서 폭넓은 활동을 벌인다는 계획이어서 이들의 활동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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