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미술·문화 일별기 - 부루 라이또 요꼬하마
일본 미술·문화 일별기 - 부루 라이또 요꼬하마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0.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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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관한 '보고'는 무척 많다. 막연한 동경과 흠모로부터 강단진 혐오와 배척에 이르기까지 이웃 나라에 대한 관심은 그 왜곡된 역사의 깊이 만큼이나 유별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최근 '죽은 과거에 충실한 역사서술'로 드러난 예의 정신적 '미숙' 상태는 다시 한번 일본의 정체에 대한 질문을 국제사회에 던졌다.

필자가 '요코하마 트리엔날레'가 열리고 있는 요코하마시를 방문한 것은 추석 직전이었다. 2박 3일의 주마간산으로 '일본 미술&문화 일별기(一瞥記)'라는 제목을 달고 글을 쓰는 게 가당찮지만, '언뜻 한 번 본' 느낌을 메모 형식으로 전하는 수준의 글임을 이해 바란다.

도쿄의 배후 도시이자 일본 근대의 상징인 요코하마시는 적어도 나에게는 불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려서 장발의 젊은 형들이 무슨 속셈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음습한 내음이 풍기는 '부루라이또 요코하마 Blue light Yokohama'라는 노래를 심각한 포즈로 흥얼거리던 낡은 삽화가 떠올려지기 때문이다. 당시 대학가 다방을 통해 꽤 유행했다던, 흔들리는 사랑의 밀어를 전하는 노래에 속절없이 탐닉한 것은 막막한 억압의 시절을 살아가던 비틀린 젊음의 자기거세 상태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시아를 통틀어 가장 먼저 근대를 경험했으면서도 근대적 아르스 비벤디(생활방식)에는 서툴거나 더딘 일본의 습속은 가는 곳마다 쉽게 감지된다. 독립된 개체의 다양성들이 엄격한 '지도원리'에 의해 획일화되고 표준화되어 있는 나라라는 선입견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쉽게 구체화된다. 가령 아침 출근길 지하철역, 비디오 데크의 '빨리감기' 정도의 속도로 정신없이 오가는, 알 수 없는 희미한 '절망'에 사로잡힌 듯한 무표정한 일본인들 틈에 우두커니 서 있다 보면, 우렁속 같은 일본 사회의 본질적인 어둠을 읽게 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기름기 번지르르한 자본의 위력 앞에
창조·모험의 시도는 너무도 초라할 뿐


'요코하마 트리엔날레'라는 문화 산물은 사실 대단한 야심의 기획이 전제된 것은 아니었다. 축구를 너무나 '사랑'하는 요코하마 민선시장이 2002월드컵 대망의 결승전을 자신의 고향에 유치하고자 하는 열망의 대가로 따분하기만한 국제미술제 개최를 받아들인 것이다. 문화의 세계화라는 매력적인 추세에 뒤지고 싶지 않은, 그러면서 세계 일류국가로 인정받을 일본 만의 '식별지'를 제시하고 싶은 욕망이 3년마다 개최하는 '트리엔날레'라는 애매한 문화적 배포 수단을 제출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열린 행사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기실 전시 내용은 국제미술계가 눈을 크게 뜨는 치밀어 오르는 성욕같은 에너지가 넘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신생 미술제다운 겸손함과 신선함도 없는 자국 작가 위주의 밋밋한 전시로 귀착되고 말았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무엇보다도 자생적 미술문화의 근거나 토대에 연연함으로써 과감한 문화적 이종교배를 두려워하는 특유의 얌전한 기획 한계에 혐의를 둘 수 있다. 또한 문화가 사회의 나침반 역할을 한다는데 동의한다면, 일본 사회의 현존 문화는 그 역할을 수행하는데 일종의 생래적 '장애'가 있음이 분명하다. 일본 사회가 외향적 모험은 종종 즐기지만, 치열한 정신적 행위가 결여된 내부의 축적된 문화 자산에 사소한 위안을 삼는 그런 성향이 트리엔날레라는 표백이 잘된 전시를 제출한 셈이다.

결국, 이번 짧은 일본 여행길이 남긴 단상은 이러하다. -부러울 정도의 세련미 넘치는 문화취미로 위장한 기름기 번드르한 자본의 위력 앞에 파열음 넘치는 창조와 모험의 시도는 언제나 초라해지기 마련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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