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를 야금야금 말아먹을 [조폭 마누라]
한국영화를 야금야금 말아먹을 [조폭 마누라]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0.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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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지 웬만해서는 한국 영화를 거들떠보지 않던 나도, [박하사탕]의 슬픈 회한에 절절한 감동 ` [쉬리]의 할리우드를 제법 잘 흉내낸 액션 ` [JSA]의 탄탄한 재미를 담은 작품성 ` [미인]의 관음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보려던 섹스씬 ` [친구]의 얼큰한 깡패 이야기에 쏠쏠한 재미를 보았고, 그래서 한국 영화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러나 [무사]를 보고 나서 "그저 그렇고 그런 영화가 '한국 영화의 절호 찬스'를 말아먹어 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염려하였다. [조폭 마누라]가 그랬다.

첫 장면은 화끈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시퍼런 칼날 소리가 물보라에 피바람을 날리며 검푸른 뒷골목을 휘몰아쳤다. 한 3분쯤. 그것뿐이었다. 그 뒤로는 자질구레한 코믹 장면에 그저 그런 액션 장면을 섞고, 쌍스런 욕설과 은어로 싸구려 단맛을 달구며, 늘어지는 스토리를 끌고 갔다. 액션보다는 코믹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 그 코믹이 조금 웃기기는 하지만, 그 웃음이 김빠진 헛웃음이다.

웃는다고 다 같은 웃음이 아니다. 웃음에도 단맛 짠맛 신맛 매운맛이 있다. [모던 타임즈]에서 챨리 채플린이 보여주는 웃음은 장아찌 깊은 짠맛에 매우 고추를 곁들여 톡 쏘는 맛이고, [JSA]의 남북한 병사가 나눈 대화에서 보여주는 웃음은 콧등이 시큰한 신맛에 가슴 얼얼한 매운맛이며, [벙어리 삼룡이]나 [라이안 처녀]에서 바보가 보여주는 웃음은 가슴 에이는
신맛에 눈물이 배어든 짠맛이다.

요즘에 텔레비전 드라마나 시트콤에서 보여주는 웃음은 짠맛도 신맛도 매운맛도 없이 그저 단맛 나는 아이스크림 같다. 단맛은 우리 입에 쉽게 다가오고 쉽게 물린다. 삼빡하면서도 오랫토록 즐기진 못한다. 싸구려 단맛은 더욱 그렇다. [조폭 마누라]에서 웃음은 싸구려 단맛이다. 검둥벌거숭이 시절에 장에서 사먹었던 알록달록 '오-다마 사탕'이 바로 그 맛이다.

그런 싸구려 사탕을 빨아대며 즐거워하는 어린 꼬마들을 무어라 탓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제대로 된 따끔한 말 한마디 없이, 그렇고 그렇게 해서 모인 관객숫자만 주어 섬기면서, 호들갑을 떠는 매스컴이 지겹기만 하다. 이런 것까지 '문화'라는 테두리에 넣어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신은경 박상면 명계남의 연기는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오히려 처음 보는 '백상어'라는 깡패가 참 인상적이다. TV 사극 [왕과 비]에서 안재모의 연산군 연기가 조금 오바하는 듯하게 느꼈는데, 이 영화에서 만나보니 참 좋은 연기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 사이에서 학창시절에 '젤 얄미운 년'이 "얼굴 예쁜데다 공부까지 잘하는 년"이라더니, 이미숙 최민수가 그런 년놈이고, 장동건도 이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안재모도 그 옆구리에 끼워 넣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이미숙 최민수의 얼굴을 스쳐만 보아도 오줌이 마려운데, 마지막에 최민수가 비장하고 매서운 얼굴로 '깜짝 출연'해서, 찝찝한 단맛에 쎄-한 박하맛을 살짝 곁들여 주었다.

영화라는 게 대중의 말초적 재미에 영합하는 '태생적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기에, 이런 영화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이런 영화는 적게 만들어질수록 좋다. 예술이랍시고 방구깨나 뀌는 사람들이, 영화를 예술 축에 끼어주지 않으려는 것도, 영화에는 이런 영화가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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