晩時之歎(만시지탄)은 있는 법이지만
晩時之歎(만시지탄)은 있는 법이지만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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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수영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1 때였다. 교내 축제가 있었고, 1학년으로서는 예외적으로 시화전에서 대상을 받았었는데(나는 한 참 나중에야 이런 식으로 문학에 유혹당해서는 발을 못빼고 마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그 때 부상(副賞)이 민음사판 {김수영 전집}이었다. 아마도 은사이셨던 곽재구 선생이 고른 부상이 아니었나 싶다. 표지엔 지금 '문학과 지성 시인선' 시집들과 비슷하게 김수영의 캐리컷쳐가 컬러로 멋지게 박혀 있었다.

시집이라고는 내가 살던 송정리 조그만 서점에서 용돈을 쪼개 샀던 [진달래 꽃] 밖에 읽어 본 적이 없었던 데다, 교과서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시라는 것이 청록파네, 생명파네, 이상이네 하는 오래된 것들뿐이었던지라, 김수영이라는 이름은 금시초문이었다. 어쨌든 보라색 스탬프 잉크로 커다랗게 찍힌 '賞'이란 말이 보기 좋아서라도 책장을 몇 넘겨보긴 했었다.

그리고 얼마 못 넘겨 '그 놈의 사진을 밑씻개로 하자'라는 구절을 읽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에 욕설이라니! 그것은 마치 그 즈음에 나왔던 곽재구 선생의 {사평역에서}의 어떤 시에서 '시를 쓰는 일이 개 좆보다 못한 날'이란 구절을 발견했을 때의 느낌과 같은 것이었다. 시를 쓰는 일이 개 좆보다 못하다니, 그럼 왜 시를 쓰누?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분노도 자학도 시가 될 수 있음을……. 아니 오히려 김수영의 시대나, 곽재구 선생이 첫 시집을 내던 80년대란 오히려 분노나 자학을 더 시답게 하던 시절이었음을……. 소월이나 영랑만이 시인이라 배웠고, <승무>나 <동천>만이 시라고 배웠던 내가 말이다. 대한민국의 문학교육이란 게 그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미련없이 김수영의 캐리컷쳐가 박혀 있는 표지를 예쁘게 오려 거기에 연애시 한 편을 써갈겼던 것인데, <코스모스와 튜울립>이라는 유치한 제목의 그 시가 목적지에 제대로 배달되었는지는 아직도 내내 궁금한 터이다(코스모스에 비유되었던 정모라는 여자애랑, 튜울립에 비유되었던 김모라는 여자애는 지금 뭐하고 살까? 헌데 나는 그 둘 중 누구에게 김수영의 초상을 바쳤던가?).

뼈와, 깊게 파인 주름살 투성이 거죽
퀭한 눈으로 어딘가를 올려다보는
김수영, 그 아름답고 치열한 삶으로
이제라도 들어가볼 일이다


대학 와서야 김수영이 거물임을 알게 되었다. 곽재구 선생이 한갓 무명의 지역문인이 아니란 사실도 함께. 당연히 제자에게 김수영을 읽히고 싶어했던 선생의 의향도 헤아릴 수 있게 되었고, 그때 상을 받았던 내 시가 '아침에는 누가 나를 천사라 부를까요'라는, 동사(凍死) 직전에 처한 거지 소년의 독백으로 끝난다는 사실도 새삼 되짚어 보아야 했다.

추측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선생은 거지 소년의 죽음을 시로 쓴 기특한 제자에게, 교과서에 실린 시와는 다른 시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분노와, 자책과, 풍자와, 조롱으로 이루어진 김수영의 세계가 진짜 시의 세계란 사실을 말이다.

김수영 전집을 이번엔 산문집과 자료편까지 포함해서 다시 샀다. 그리고 표지를 오려 연애 편지를 쓰는 대신 여러 날을 두고 꼼꼼하게 읽었다. 창비에서 나온 선집 {사랑의 변주곡}은 대학 2학년 몇 달 동안 내 가방 속에 내내 들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늦게서야 {김수영 전집}은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한 셈이었다.

그러나 최하림 선생의 {김수영 평전}이 있는 줄은 몰랐다. 아마도 평전이 81년에 나왔으니 내가 김수영을 다시 읽던 87년쯤에는 그 책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지 싶다. 결국 일주일쯤 전, 다시 펴낸 최하림 선생의 {김수영 평전}을 보고서야 그 초판이 20년 전에 벌써 나왔던 것임을 확인했다.

표지 몇 장을 넘기면, 뼈와 거죽과 그 거죽에 생긴 깊은 주름살만 남은 한 사내가, 낡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한 팔로 얼굴을 겨우 겨우 떠받친 채로 45도 쯤 높은 어딘가를 퀭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다. 항상 '晩時之歎은 있는 법이지만' 이제라도 그 사내의 아름답고 치열한 삶 속으로 들어가 볼 일이다. 최하림 선생이 길잡이라면 그 삶 또한 시 못지 않을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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